*개인적 캐해석

 

절망행진곡 IF 엔딩 1 -13편, 그날 밤부터

 

 

어두운 방 안에 혼자 앉아있다. 카라마츠는 자신의 배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이불은 전보다 조금 더 두텁고 푹신한 것으로 바뀌었다. 쵸로마츠의 배려. 카라마츠는 손을 뻗어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럽다. 카라마츠는 천천히 몸을 눕히고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온 몸이 이불에 감싸여지니 포근함은 배가 된다. 아주 느릿하게 잠에 빠져든다.

쵸로마츠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다. 쵸로마츠는 자신과 모든 형제들을 걱정하고 있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한 생명을 사회의 일원으로 길러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자신조차 그렇게 되지 못했는데 무사히 기를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지만 카라마츠는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막 잠에 빠져들려던 카라마츠는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쥬시마츠가 서 있다. 쥬시마츠? 카라마츠가 그를 부르자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카라마츠의 앞에 내려놓는다. 옷이다. 카라마츠는 멍하니 옷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쥬시마츠를 바라봤다. 갈아입어, 카라마츠 형. 카라마츠는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쥬시마츠의 눈은 전에 없이 진지했고,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결심에 빛나고 있었으니까.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잘 들어, 카라마츠 형. 우린 집을 떠날 거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멀리. 지금 가지고 있는 돈으로 최대한 멀리 떠날 거야. 그리고 그곳에서 형과 나는 같이 살아 갈 거야. 일자리도 구하고,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만한 방도 구할 거야. 형은 일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일 할 게. 형은 집에서 아기와 함께 나를 맞이해 줘. 그거면 충분해.

쥬시마츠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라마츠는 별 말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두 손을 잡는다. 잡은 손이 따듯하다. 아니, 뜨거워. 카라마츠는 코끝이 찡해지는 느낌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쥬시마츠는 한 손을 들어 카라마츠의 뺨을 쓰다듬었다. 카라마츠는 아랫입술을 놓고 쥬시마츠를 바라봤다.

 

“가자.”

 

둘은 집을 나왔다. 한 손으론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한 손으론 카라마츠의 손을 잡고 쥬시마츠가 앞장섰다. 카라마츠는 그 뒤를 따라 나서며 방금 전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 쥬시마츠가 이러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은 왜 쥬시마츠를 따라가고 있는가. 카라마츠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바쁘게 걸어가면서 얘기하는 것보단 기차든 뭐든 탄 다음에 얘기하는 게 더 편할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이유가 중요한가. 결국 자신은 쥬시마츠를 따라 갈 탠데.

한참을 걸어 겨우 역에 도착했다. 며칠 내내 누워있기만 하다가 갑자기 움직이니 온몸이 쑤신다.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의자가 차가웠지만 그걸 신경 쓸 틈이 없다. 일단 다리를 쉬게 해줘야지. 쥬시마츠는 옆에 앉아서 카라마츠의 다리를 주물러주었다. 말하지도,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카라마츠는 쥬시마츠를 바라보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쥬시마츠는 그런 카라마츠를 올려다보다 베시시 웃었다. 아까 전에 진지하게 가라앉았던 얼굴은 어디로 간 건지.

 

“출발 시간은 한 시간 뒤야.”

 

쥬시마츠가 기차표를 건넨다. 카라마츠는 그것을 받아 주머니에 잘 넣어둔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바라보다 근처 편의점을 가리킨다. 뭐라도 마실래? 목마르지 않아? 카라마츠 형. 카라마츠는 대답 대신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바라보다 그의 옆에 앉았다.

이제 물어봐야 할 시간이다. 카라마츠는 어떤 질문을 먼저 할지 생각했다. 한 시간이면 모든 것을 얘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 아까 전에 든 의문이 뭐가 있었지. 그 중에서 가장 궁금한 건 뭐였지. 가장 알아야 할 건 뭐지. 카라마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고개를 돌려 쥬시마츠를 바라봤다. 쥬시마츠도 카라마츠를 바라본다.

 

“왜 집을 떠나려고 하는 거야?”

 

쥬시마츠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카라마츠를 바라봤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쥬시마츠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사람이 없는 역은 조용하고, 차갑게 가라앉아있다. 마치 지금 자신의 머릿속처럼. 쥬시마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지금 드는 이 생각을 그대로 전해도 괜찮은 걸까. 괜찮겠지. 카라마츠라면 자신이 아무리 터무니없는 이유를 대도 같이 가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집에 있는 것보다 떠나는 게 더 행복하니까.”

 

그 집은 형한텐 온통 불행뿐이야. 그곳에 있으면 그때 일이 떠오를 거고, 계속 오소마츠 형과 이치마츠 형과 마주쳐야 하고. 나하고 마주치는 일도 힘들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 둘과 같은 지붕아래 있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하니까. 나는 모든 형제가 행복하길 바랐어. 그 형제엔 당연히 형도 들어가. 그리고 지금은 형의 뱃속에 있는 아기까지. 생각했어. 어떻게 하면 모두가 행복 해 질 수 있을지. 무리야. 모두가 행복해지는 건 무리야. 한 명의 희생으로 행복해진다면 그건 행복하지 않은 거야. 그래서 형과 같이 떠나기로 했어. 형만이라도. 아니, 형과 아기만큼이라도 행복 할 수 있도록.

쥬시마츠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까 전, 집을 나올 때 들었던 쥬시마츠의 목소리와 같았다. 카라마츠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쥬시마츠는 바보처럼 보일지 몰라도 가장 생각이 깊고, 마음씨가 넓은 동생이다.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카라마츠는 손을 들어 쥬시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돈은 어디서 났어?”

 

쥬시마츠의 몸이 크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카라마츠는 고개를 갸웃하며 쥬시마츠를 빤히 바라봤다. 쥬시마츠는 입을 꾹 다문 채 놀랐을 때 짓는 표정을 지으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도대체 돈을 어디서 구했기에 이러는 걸까. 카라마츠는 재촉하지 않으려했지만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어디서 났냐니까? 볼을 콕콕 찌르며 물으니 쥬시마츠가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린다. 방금 전과 다르게 작은 목소리에다가 발음도 정확하지 않았지만 카라마츠는 그 말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오소마츠 형이랑 이치마츠 형이 빠칭코에서 따고 숨겨놓은 돈, 몰래 가져왔어.”

 

카라마츠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제 돈이 잘 있나 확인하다가 돈이 없어져 울 오소마츠와 이치마츠의 얼굴이 생각난 탓이었다. 통쾌함이 느껴졌다. 일종의 복수라는 걸까. 쥬시마츠도 어쩌면 같은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웃던 카라마츠는 숨을 몰아쉬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카라마츠 형,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카라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쥬시마츠는 그런 카라마츠를 바라보다 평소처럼 헤헤 웃었다. 카라마츠는 그런 쥬시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몸이 노곤해졌다. 긴장이 단번에 풀린 탓인가. 쥬시마츠가 카라마츠의 손을 잡아준다. 카라마츠도 쥬시마츠의 손을 잡아주었다.

 

“언제 이러기로 결심 한 거야?”

 

하루 만에 갑자기 결정 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모든 걸 포기해야하니까. 쥬시마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번엔 재촉하지 않았다. 생각을 정리 할 시간이 필요 할 태니까. 대신 카라마츠는 근처에 걸려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얼마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20분이나 지나갔다. 남은 시간은 40분. 형제 중 하나가 따라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카라마츠는 고개를 돌렸다. 쥬시마츠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고, 고개는 숙여져있었다. 잡힌 손엔 힘이 들어가 조금 아플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카라마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딱히 더 들을 필요가 없다.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어쩔 생각이었어?”

 

쥬시마츠가 팍 고개를 든다. 카라마츠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는다. 쥬시마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카라마츠는 잡힌 손을 들어올렸다. 쥬시마츠의 손도 따라 올라온다. 빈손으로 쥬시마츠의 손을 만지작거린다. 항상 여기저기에서 운동을 하고 다니니 손이 꽤 거칠다.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쥬시마츠가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본다.

 

“다른 방법을 생각했겠지.”

 

형이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한다면 그것도 불행이니까.

그 뒤로는 카라마츠도 쥬시마츠도 말이 없었다. 그저 손만 꼭 붙잡고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색하다거나 춥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잡은 손이 따듯했고, 옆에 있음이 편안했다. 카라마츠는 조심스럽게 쥬시마츠에게 몸을 기댔다. 쥬시마츠는 빈손을 들어 카라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쥬시마츠와 카라마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쥬시마츠는 캐리어를 끌고, 카라마츠와 함께 걸어갔다. 카라마츠는 주머니에서 기차표를 꺼냈다.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 명이 아니었다. 둘? 셋? 넷. 네 명. 쥬시마츠와 카라마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기차가 출발하기까지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카라마츠! 쥬시마츠!”

 

쵸로마츠의 목소리가 들린다. 뒤이어 토도마츠, 이치마츠, 오소마츠. 쥬시마츠와 카라마츠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집에서부터 뛰어온 듯 모두 얼굴이 붉어진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바라봤다. 카라마츠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단단히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

 

“쥬시마츠 형!”

 

쥬시마츠는 고개를 돌려 토도마츠를 바라봤다. 토도마츠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쥬시마츠는 소리 없이 입만 움직였다. 토도마츠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쥬시마츠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기차를 향해 걸어간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후회 안 해?”

 

오소마츠가 소리친다. 안 해. 카라마츠가 대답한다.

 

“진짜로 갈 거야?”

 

이번엔 이치마츠다. 갈 거야. 쥬시마츠가 대답했다.

 

“가면 언제 돌아 올 건데!”

 

쵸로마츠. 카라마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쥬시마츠를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돌려 형제들을 바라봤다. 모두가 다 같이 일그러진 얼굴. 카라마츠는 미소를 지었다.

 

“돌아오지 않아.”

 

카라마츠는 쥬시마츠의 손을 이끌고 빠르게 걸어갔다. 쥬시마츠는 뒤돌아보지 않고 카라마츠와 같이 걸어갔다. 기차에 올라탈 때까지 망설임은 없었다. 자리에 앉았다. 곧 기차가 출발한다는 방송이 들려온다. 기차 밖으로 형제들의 모습이 보였다. 카라마츠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웅크렸다.

 

“잘 한 선택일까.”

 

기차가 움직인다. 천천히 속도를 올리던 기차는 어느새 빠르게 역을 벗어난다. 형제들의 모습이 점처럼 작아진다. 표정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끌어안았다. 카라마츠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소리 내지도 않았다. 그저 배를 끌어안은 채 울 뿐이었다. 쥬시마츠는 말없이 카라마츠를 위로했다.

 

 

“다녀왔어!”

 

쥬시마츠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다. 카라마츠는 쥬시마츠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괜히 무안 해 진 쥬시마츠는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조심히 카라마츠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아 아기를 내려다본다. 입을 우물거리며 곤히 자고 있는 아기는 정말로 귀여웠다. 쌍둥이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니 저를 닮은 것이 분명한데도 그렇게 느껴졌다. 쥬시마츠는 헤헤 웃었다.

 

“저녁은?”

 

먹고 들어왔어. 쥬시마츠는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카라마츠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아기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아기가 꼬옥 손을 잡아온다. 쥬시마츠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카라마츠의 뒤로가 앉아 그를 끌어안았다. 카라마츠는 익숙하다는 듯 손을 들어 쥬시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름은 생각해봤어? 이제 곧 백일인데 아직도 이름이 없잖아.”

 

카라마츠가 묻는다. 쥬시마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라마츠의 귓가에 속삭였다. 코우마츠(光松). 쥬시마츠다운 이름이라 생각하며 카라마츠는 종이에 이름을 적었다. 쥬시마츠는 깔끔하게 적힌 이름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카라마츠와 아기의 손을 같이 잡았다. 두 개의 온기가 자신의 손으로 옮겨온다. 따듯해.

있지, 카라마츠 형아. 형은 지금 행복해? 쥬시마츠가 물었다. 응. 카라마츠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쥬시마츠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카라마츠가 행복하다면 자신도 행복했다. 지난 시간 동안 카라마츠를 데리고 나온 걸 후회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 카라마츠가 행복해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 후회는 쓸모없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카라마츠가 행복해 하고 있다.

아기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조촐하게 백일 기념 파티도 했다. 토도마츠와 쵸로마츠에게만 간간히 아기와 카라마츠 사진을 보내주며 연락하고 있다. 집의 위치는 알려주지 않았다. 찾아오면 카라마츠가 힘들어 할 태니까. 쥬시마츠는 카라마츠를 위한 완벽하게 행복한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카라마츠를 외부와 거의 차단시키고,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제 손으로 전해준다. 카라마츠는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서히 물들어갔다.

그렇게 쥬시마츠가 원하는 대로 둘 만의 집은 행복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Posted by 누군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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