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시여, 저는 평생 중 반 이상을 당신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을 향한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릴까 합니다. 부디 노여워 마시고, 부디 이 일로 인간에게서 등을 돌리지 마시고, 부디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돌려주시옵소서.
신이시여, 저는 어렸을 적부터 당신을 섬겼고, 사랑했고, 바라보았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을 위하여 살았고, 오로지 당신만을 위하여 일했고, 오로지 당신만을 위하여 희생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저를 위해 살고자 합니다. 저를 위해 그를 사랑하고, 저를 위하여 그를 대신해 희생하고자 합니다. 신이시여, 부디 노여워하지 말아주시옵소서.
신이시여, 신이시여. 당신이 저에게 내리는 시련은 달게 받겠사옵니다. 당신이 저에게 내리는 벌은 기꺼이 받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그에게만은 벌을 내리지 말아주십시오. 그를 시련에 들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는 가엽고, 안타까운 이입니다. 또한 제가 사랑하는 이입니다. 그러니 부디, 신이시여, 부디, 그를 괴롭게 하지 마시옵소서.
전지전능하신 신이시여, 만인을 사랑하시는 신이시여,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신이시여, 모두를 안아주신 신이시여. 부디 앞으로도 모든 이를 사랑하여 주시고, 모두를 안아주시옵소서. 저로 인해 불쌍한 이들에게 등을 보이지 말아주시옵소서.
신이시여, 마지막 기도를 올립니다. 당신을 사랑했고, 당신을 믿었으며 당신을 위하여 희생했습니다. 이제 저는 저의 삶을 살겠습니다. 신이시여, 그동안 사랑했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이제 죄인은 물러나겠습니다.
만약 신이 정말로 계셨다면 이건 그분이 나에게 내리는 벌이겠지. 카라마츠는 불타오르는 의자를 바라보며 웃었다. 자신의 죄니 자신이 갚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벌을 내린 신이 원망스러웠다. 카라마츠는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며 몸에서 힘을 뺐다. 곧 제가 기대고 있는 벽도 타오를 것이고, 자신의 몸도 타서 한줌의 재로 변해버리겠지. 밖으로 빠져나가는 건 할 수 없다. 문이 막혀있으니까.
곧 죽을 상황에서도 카라마츠는 안심한다. 자신의 사랑이, 자신을 바꾼 그가 제 곁에 없다는 것에. 만약 그가 제 옆에 있었다면 분명 저를 살리려 했겠지. 그렇게 된다면 그는 사라질 거야. 카라마츠는 몇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다행이다, 그가 옆에 없어서 다행이다. 카라마츠는 히죽 웃으며 눈을 감았다. 슬슬 숨을 쉬기조차 힘들어진다.
평생을 신을 섬기며 살아왔다. 평생을 신과 함께 살아왔다. 그러다 반년 전, 산불이 났던 그 가을에 신의 손을 놓았다.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신의 뒤를 쫓는 대신 그의 옆에서 걸었다. 지난 수년간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처음으로 느꼈다. 카라마츠는 그 반년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행복이란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지만 모든 게 다 끝났지. 신의 손을 놓은 그 순간부터 신은 저에게 벌을 내릴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카라마츠는 하하, 웃다가 기침을 했다. 연기가 맵다. 불에 타기 전에 숨이 막혀 죽을 것이 분명했다. 아, 죽는 거구나. 나는 신의 벌에 의해 죽는 거구나.
이기적이게도, 이 순간에도 카라마츠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없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옆에서 제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바보 같다. 멍청이다. 하하. 카라마츠는 헛웃음을 내뱉다 기침을 하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올 리가 없다. 오늘 밤은 절대로 오지 말라고, 약속했으니까. 악마에게 있어서 약속의 의미는 상당히 큰 것. 계약 그 이상의 것. 카라마츠는 조금 후회했다.
그래도 자신과의 약속 때문에 오지 못 한 거니까 스스로를 원망하진 않겠지. 카라마츠는 안심과 후회를 반복하며 그저 웃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 살아난다 하더라도 자신은 언젠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불에 타서 형체가 사라져버리는 것 이상의, 어떤 끔찍한 죽음. 그런 죽음을 그의 눈에 들게 할 순 없지.
그나저나 오늘 이럴 줄 알았으면 서랍 속에 쌓아두었던 그 편지들을 그에게 전해주는 건데. 또 후회할 만한 일이 떠올랐다. 카라마츠는 손을 들어 한 번 더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미 죽기로 결심했는데 이 이상 후회해봤자 무엇하랴. 빠져나가기엔 이미 늦은 것을. 카라마츠는 모든 것을 놓기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이제 정말 모든 게 끝이야. 카라마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점점 더 숨이 막혀온다. 아, 그래도 역시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이 보고 싶다. 나의 사랑, 사랑스러운 나의 아기 고양이, 나의 천사. 나의 작은 악마. 다시 한 번 그와 입을 맞추고, 그를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어. 카라마츠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 한 번 더 사랑한단 말을 듣고 싶어.
“들으면 되잖아.”
아. 여전히 나를 안는 너의 팔은 다정하구나. 카라마츠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억지로 들어 올려 그를 끌어안았다. 그는 카라마츠의 머리를 꾹 눌러 제 품안에 묻게 만들고는 고개를 숙였다. 멋대로 일 진행시키지 말라고. 까득, 이를 갈면서 말하는 목소리에 카라마츠는 작게 웃었다. 미안하군, 이치마츠.
“미안하면 하지 말라고.”
이게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닌데. 쓸데없는 변명이라는 생각이 들어 카라마츠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저를 끌어안는 단단한 팔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또 다시 이기적인 생각이 든다. 이미 자신은 이기적이지만 여기서 더 이기적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이치마츠에게 최악으로 남으면 어떻게 하지? 카라마츠는 이치마츠의 옷을 붙잡았다.
“카라마츠?”
마지막인데 한 번 쯤은 이기적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카라마츠는 고개를 들어 이치마츠의 눈을 마주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치마츠의 입에 짧게 입을 맞췄다 뗀다.
“이치마츠.”
다시 한 번 짧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카라마츠는 후우, 길게 숨을 내쉬고 천천히 입을 연다.
“이기적인 부탁이란 걸 안다. 그렇지만, 내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겠나?”
이치마츠는 카라마츠를 바라봤다.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그리고 어두웠다. 언제나 밝게 빛나던 그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눈은 생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최근 있었던 일들이 그를 이렇게 만든 거겠지. 더군다나 이곳은 불에 타오르고 있다. 자신에겐 괜찮겠지만 그에겐 죽을 정도로 괴롭겠지. 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이치마츠.”
카라마츠는 숨을 몰아쉬며 이치마츠를 바라보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바라보며 말 할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이기적인 부탁이라, 분명 그가 싫어할 거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카라마츠는 입술을 잘근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 다음 생을 살아주지 않겠나.”
너는 영생을 사는 악마. 약속을 어긴 것으로 인해 생긴 상처야 시간이 지나면 나을 너에겐 별거 아닐 상처. 하지만 자신은 죽는다. 그것도 곧. 그렇게 된다면 이치마츠를 다시 만나는 건 불가능하겠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치마츠가 자신을 찾아 올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 살아 날 수도 있는 거니까. 이 세계 말고도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분명.
“나와 함께 다음 생으로 가는 문을 넘어주겠나.”
이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카라마츠는 알고 있었다. 이치마츠에게 영생을 포기하고 다음 생에서 인간 또는 그 외에 어떤 생명체로 같이 태어나자하는 이기적이고도 이기적인 말. 카라마츠는 고개를 들어 이치마츠를 바라봤다. 이치마츠는 입을 벌린 채 카라마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어?”
이치마츠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리 같이 환생 문을 넘는다고 해도, 같은 세계에서 태어날 확률은 희박했다. 세계는 수없이 많았고, 환생문은 그 세계 중 한 개로 무작위로 연결됐다. 물론 동시에 같이 넘는다면 같은 세계에서 태어나는 게 가능 할지도 몰랐지만 같은 시대, 같은 나라, 같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순전히 운이었다.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눈을 바라봤다.
“안 되는 건가?”
안 될 리가. 이치마츠는 입을 다물었고 고개를 저었다. 도박이지만 도전 해 볼만 했다. 어차피 자신은 카라마츠가 죽는다면 그 뒤를 따를 생각이었으니까. 단지 그 시기가 예상과 다르게 몇 십 년 정도 앞당겨졌을 뿐이지. 이치마츠는 카라마츠의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잘 따라와, 너는 멍청이니까. 중간에 놓치지 말라고.”
아아, 물론이다! 이치마츠의 말에 카라마츠는 방긋 웃었다.
불길이 두 사람을 덮치는 건 순식간이었고, 다음날 아침 그 자리엔 불에 탄 성당만 남아있을 뿐 사람이 있었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